글로벌 결제시장의 재편과 스테이블코인의 부상

글로벌 금융 산업은 이제 새로운 지정학적, 기술적 패러다임에 진입했습니다. 과거 1990년대부터 2010년대 후반까지의 금융 산업을 지배했던 대원칙은 '보편적 효율성(Universal Efficiency)'의 추구였습니다. 국경, 통화, 시간대의 장벽을 허물고 자금을 가장 빠르고 저렴하게 이동시키는 단일한 글로벌 표준을 향한 수렴이 이 시기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러나 2025년을 기점으로 금융산업은 '시스템 간의 경쟁(Competing Systems)'이라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이제 결제는 단순한 자금의 이동 수단이 아니라 서로 다른 철학, 기능, 제약을 가진 다양한 시장 시스템들이 주도권을 놓고 각축전을 벌이는 전장입니다. 한쪽에서는 중앙 인프라를 통한 통제와 상호운용성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시스템이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탈중앙화(Decentralization), 프로그래밍 가능성(Programmability), 그리고 민간 주도의 레일을 우선시하는 새로운 세력이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금융과는 전통적으로 무관했던 플랫폼, 디바이스, 네트워크가 결제 기능을 내재화하면서 산업의 경계조차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2026년은 '스테이블코인(Stablecoins)'과 '토큰화된 화폐(Tokenized Money)'가 실질적인 결제 수단으로 도약하는 원년이 될 것입니다. 코인게코가 발표한 ‘2025년 연례 가상자산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스테이블코인 시가총액은 2025년 한 해 동안 48.9% 성장해 3,110억 달러(약 458조원)를 기록했습니다. 미국 블룸버그는 2025년 스테이블코인 거래 규모가 33조 달러(약 4경 8,600조원)에 달했고 4분기에만 11조 달러를 기록했다고 집계했습니다. 또한 블룸버그 인텔리전스는 스테이블코인 결제 흐름이 연평균 81% 성장해 2030년에는 56조 6,0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이러한 추세에 발맞춰 스테이블코인 확산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규제 불확실성도 해소되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 상원을 통과한 '2025년 미국 스테이블코인 혁신 및 구축법(Genius Act)'은 게임 체인저로 평가받습니다. 이 법안은 스테이블코인 발행자가 1:1 준비금(Reserves)을 유지하고, 이자 지급을 금지하며, 엄격한 자금세탁방지(AML) 및 고객확인(KYC) 의무를 준수하도록 규정했습니다. 이는 스테이블코인을 투기 자산이 아닌 법정화폐에 준하는 '디지털 현금'으로 격상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유럽의 MiCA(Markets in Crypto-Assets) 규제와 더불어, 주요국들은 이제 전통 금융 기관(은행)들이 디지털 자산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법적 고속도로를 깔았습니다. 스테이블코인은 이제 암호화폐 거래소 간의 자금 이동 수단을 넘어 실물 경제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스테이블코인의 대다수(99% 이상)는 달러를 기준으로 하며, 이에 따라 미국 달러 자산으로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만약 스테이블코인을 하나의 국가로 본다면, 미국 국채 보유 규모 기준으로 세계 14위에 해당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스콧 베센트(Scott Bessent) 미국 재무장관은 “우리는 미국을 세계의 지배적인 기축통화 국가로 유지할 것이며, 이를 위해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할 것이다”라고 언급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재무부 차입자문위원회(Treasury Borrowing Advisory Committee)는 스테이블코인 공급 규모가 2028년까지 2조 달러로 성장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스테이블코인이 주목받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 B2B 국경 간 결제: 스테이블코인은 24/7 가동되며 중개 은행을 거치지 않는 '항상 켜져 있는(Always-on)' 네트워크를 제공합니다. 이는 기존 환거래 은행(Correspondent Banking) 시스템의 느린 속도와 높은 수수료 문제를 해결하는 강력한 대안입니다.
  • 토큰화된 예금(Tokenized Deposits): 은행들은 고객의 예금을 블록체인 상의 토큰으로 변환하여, 고객이 자금을 예치한 상태에서 이자를 수취하면서도(Intraday Returns) 이를 담보로 즉시 결제나 유동성을 활용할 수 있게 하는 상품을 출시하고 있습니다.
  • 프로그래밍 가능한 돈: 스마트 계약(Smart Contracts)을 결합하여, 특정 조건(예: 물품 배송 완료)이 충족될 때만 자금이 자동으로 이체되는 에스크로 기능을 내재화할 수 있습니다. 이는 무역 금융과 공급망 관리의 효율성을 극대화합니다.

맥킨지는 스테이블코인 발행 규모가 2024년 초 2,500억 달러 수준에서 2025년 말 4,000억 달러를 돌파하고, 2028년에는 2조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합니다. 이는 디지털 자산이 더 이상 틈새시장이 아니라 주류 금융의 일부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최근 블록체인 데이터 분석 플랫폼 아르테미스(Artemis)가 캐슬 아일랜드 벤처스(Castle Island Ventures), 드래곤플라이(Dragonfly)와 함께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스테이블코인이 단순한 투기적 용도를 넘어 글로벌 결제 인프라로 자리잡고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바이낸스 페이(Binance Pay), BVNK, 스트라이프(Stripe/Bridge) 등 33개 기업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2023년 1월부터 2025년 8월까지 확인된 스테이블코인 결제액은 약 1,360억 달러(약 180조 원)에 달하며 2025년 8월 기준, 연간 결제 규모는 약 1,220억 달러 페이스로 성장했습니다. 물론 이는 전체 온체인 거래량의 약 1% 수준으로 적게 보일 수 있지만, 트레이딩이나 MEV(최대 추출 가능 가치) 등을 제외한 '순수 경제 활동(상품 구매, 송금, 급여 등)'만을 발라낸 수치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사용처의 변화입니다. 개인 간 송금(P2P)이 주류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기업 간 거래(B2B)가 시장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스테이블코인의 B2B 결제는 연간 760억 달러로 전체 결제 유형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국경 간 송금의 비효율성을 해결하기 위해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으며, 2024년 하반기부터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P2P 송금은 연간 190억 달러로 여전히 중요한 사용처이지만, 최근 성장세는 B2B에 비해 평이한 수준입니다.  카드 결제는 연간 180억 달러로 비자(Visa), 마스터카드(Mastercard) 네트워크와 연동된 크립토 카드를 통한 결제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이는 스테이블코인이 실생활 소비로 직접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B2B 결제 규모가 급성장한 데에는 단순한 유행이 아닌, 기존 금융 시스템의 비효율성을 해결하는 실질적인 '경제적 효용'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데이터에 따르면 B2B 스테이블코인 결제량은 2023년 초 월 1억 달러 미만에서 2025년 중반 월 60억 달러 이상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결제용 스테이블코인 시장에서 테더(USDT)의 점유율은 약 85%로 2위인 서클(USDC)과의 격차는 여전히 큽니다. 또한 트론(Tron)은 결제가 이루어지는 블록체인 네트워크로는 트론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으며, 그 뒤를 이더리움(Ethereum)과 바이낸스 스마트 체인(BSC)이 잇고 있습니다.

주류 시장에 편입되는 스테이블코인

스테이블코인은 글로벌 결제 인프라의 성장하고 중요한 구성 요소로 자리 잡았으며, 거래 유형과 지역 전반에 걸쳐 사용이 확대되고 있다. 이는 스테이블코인이 국제 경제 시스템 내에서 점점 더 중심적인 역할을 차지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스테이블코인은 더 이상 '크립토 네이티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글로벌 금융 시스템의 대안적인 결제 레일(Rail)로 확실히 자리 잡았음을 시사합니다. 특히 B2B 결제와 카드 결제의 급성장은 스테이블코인이 투기적 용도를 벗어나 기업의 자금 관리와 일반 소비자의 일상 결제로 깊숙이 파고들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미 재무부 등 주요 기관에서도 스테이블코인을 달러 지배력을 유지하는 도구로 인식하기 시작한 만큼, 향후 규제 완화와 함께 이 시장은 더욱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우리 정부는 ‘2026년 경제성장전략’을 통해 디지털자산 2단계 입법을 추진하고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종합 규율 체계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는데요. 법안에는 발행사 인가제, 100% 이상 안전자산 보유 의무화 등이 골자로 담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정부와 여당은 올 1분기 안에 ‘디지털자산기본법’ 제정을 추진 중인데요. 이러한 입법 움직임은 단순한 규제 강화라기보다,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 금융 인프라로 편입시키겠다는 정책적 선언에 가깝습니다. 발행사 인가제와 준비자산 100% 보유 의무는 시장 진입 장벽을 높이는 대신 신뢰를 제도적으로 보증하는 장치로 작동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는 무분별한 민간 발행을 억제하는 동시에, 일정 요건을 충족한 사업자에게는 명확한 사업 지속성과 확장성을 부여하는 ‘선별적 개방’ 전략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블록체인 기반의 글로벌 결제 수단이라는 특성상, 국내 규제만으로는 그 파급효과와 리스크를 온전히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에, 향후 법안은 국제 공조와 정합성을 강하게 의식한 형태로 설계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는 EU의 MiCA, 미국의 스테이블코인 관련 논의와 보조를 맞추려는 움직임으로도 읽힙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스테이블코인을 ‘통제의 대상’으로만 볼 것인가, 아니면 ‘전략적 금융 인프라’로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입니다. 글로벌 결제 질서가 재편되는 전환점에서, 스테이블코인을 어떻게 제도화하고 금융 시스템 안에 흡수하느냐에 따라 한국의 디지털 금융 경쟁력과 통화 영향력은 중장기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의 입법 논의는 그 방향을 가늠하는 첫 단추이며, 향후 정책 설계와 실행의 정교함이 그 성패를 좌우하게 될 것입니다.

글: 투이컨설팅 디지털 연구소